담배와 미술史
“담배 언제 끊었어?”
“중3 때.”
“왜?”
“맛없어서.”
중3 때 처음 피운 담배는 맛이 없었다. 그래서 끊었다.
결단력과 의지력은 필요 없었다. 내가 담배를 핀 이유는 맛이 아닌 책 때문이다.
레마르크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는 17세에 참전한 독일 병사 파울 보이머가 전쟁터에서 적군과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개비마다 둘로 꺾어 이것을 러시아 병사에게 주었다. 러시아 병사는 허리를 굽혀 절하고는 거기에 불을 붙였다. 두서너 명의 얼굴에서 빨갛게 점점이 희미한 빛을 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마치 깜깜한 시골집에 보이는 작은 창과 같았다. 그 창 안에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방이 있는 것처럼 연상되었다.”
- 『서부전선 이상 없다』 중에서
책을 덮고 안방에서 아버지의 담배를 인출(?) 후 내 방으로 돌아와 불을 끄고 거울 쳐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뱃불이 별처럼 빛나도록 열심히 흡입. 잠시 후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방” 분위기는 연출되지 않았고, 재떨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담뱃재가 손등에 각인시켰다. (전등) 불을 켜자 인류애가 아닌 미친 짓을 발견했다(화상은 흉터를 남기지 않았다).
소설 『개선문』
그 후 범우사에서 나온 레마르크 소설 『개선문』을 읽고,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 레마르크 전집을 구했다. 덕분에 십대 후반부터 원심력의 다원성을 강렬하게 발산한 세계시민 레마르크 매력에 푹 빠진다(이십 대 중반 ‘우표 딱지만 한 조그만 고향’에서 강력한 구심력을 작동시킨 포크너의 마력으로 중화된다).
소설 『개선문』에도 담배가 나오고, 새로운 관계가 등장하나, 적군의 병사가 아닌 여인이다.
그는 담뱃갑을 꺼낸 다음 성냥을 찾았다. 성냥갑 속에 두 개비밖에 없어, 강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불이 꺼질까 그는 조심스레 몸을 굽혀 두 손으로 불을 가렸다.
“저도 담배 하나만 주세요.” 하고 여인은 억양 없이 말했다.
라비크는 굽혔던 몸을 펴고 담뱃갑을 내밀었다.
여인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담배를 뽑아 들었다. 여인은 성급하게 담배를 빨았다. 라비크는 성냥개비를 난간 너머로 내던졌다. 그것은 조그만 별똥처럼 어둠을 뚫고 날아가다 수면에 닳아서야 꺼졌다. (범우사, 1989, 12쪽)
“저기 다음 수레가 오는군. 부를까? 그렇지 않으면 우선 한 대 피우기로 할까?”
“먼저 한 대 피우지요.”
“좋아. 오늘은 딴 것을 가지고 있거든. 그 시커먼 것이 아니고 말이야.”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여자는 뒤로 몸을 기대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여자는 라비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좋네요.” 하고 여자는 말했다.
순간적이긴 했지만 라비크에게는 여자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아 보였다. (같은 책, 77쪽)
그리고 담배와 함께 술이 나온다.
여주인공 조앙 마두는 라비크에게 처음 함께 마신 술을 묻는다.
“그때 제게 마시라고 주시던 것이 무엇이었지요?”
(중략)
“왜 그것을 마시려고 그러지? 그게 그렇게 좋았었소?”
“그런 게 아니고 그런 훈훈한 술은 처음 마셔 보았기 때문이에요.”
“어디서 마셨지?”
“개선문 근처의 조그마한 비스트로였어요.”
“아, 이제야 알았어. 아마 칼바도스였을 거야. 노르망디에서 나는 사과로 만든 브랜디야.”(123쪽)
그렇게 프랑스를 상징하는 파리의 개선문은 독일 망명객 라비크와 이탈리아 여인 조앙 마두에게 담배와 술로 각인된다(개선문은 빗속에서(14쪽) 이방인을 맞이하고, 어둠 속에서(518쪽) 떠나보낸다).
소설 속 담배와 술이 공허한 내면을 채운다기보다 무감각하게 하는 진통제이자 마취제로 작용한다면, 책과 그림은 내면을 보호하는 성벽과 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으로 배치된다.
“그는 수표를 수첩 사이에 끼워 두고 책을 한 아름 침대 곁에 놓인 탁자에다 놓았다. 잠이 안 올 때 읽으려고 이틀 전에 사 두었던 책이었다. 책이란 이상한 물건이다. 그에게는 책이 점점 중요한 것이 되어 갔다. 책이 비록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이르게 했다. 처음에 2, 3년간은 그는 책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비하면 책 같은 것은 아무런 생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제는 하나의 벽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설사 보호는 못해 준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에 기댈 수는 있다. 별로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책은 어둠을 향하여 곧장 역행하고 있는 이런 시대에서 최후의 절망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일찍이 숭앙되었던 사상이 지금에 와서는 멸시와 조롱을 당하고 있지만 그런 사상은 여전하게 생각되었으며, 앞으로도 언제까지든 살아 있을 것이다.”(384쪽)
책들이 주인공 내면에 성벽을 쌓는 벽돌처럼 차곡차곡 내성을 키웠다면, 그림은 스멀스멀 연기처럼 눈을 맵게 하여 결국 창문을 열게 만들어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같은 싸구려 건물에 새들어 사는 로젠펠트가 외출을 나가자 집주인은 방안에 남은 넝마 조각(캔버스)의 값어치를 알고 싶어 라비크를 방으로 끌고 온다.
그때까지 라비크는 벽을 주위해 보지 않았었다. 그는 이제 벽을 쳐다보았다. 그의 앞에 놓은 침대 위에는 반 고호가 가장 재능을 발휘했던 시기에 그렸던 아르르의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그는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림이 진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한심스러운 그림이죠?” 하고 주인 여자가 물었다. “저 비뚤어진 물건이 나무라는군요! 그리고 저걸 좀 보세요!”
그것은 세면대 위에 걸려 있었다. 고갱의 그림으로 열대 지방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벌거벗은 남양 토인 여자를 그린 그림이었다.
“저 다리 좀 보세요! 마치 코끼리 같은 발꿈치예요. 그리고 저 미련스러운 얼굴을 좀 보세요! 서 있는 꼴도 우습지요? 그리고 저기에도 한 장이 있는데, 그것은 미처 다 그리지도 못한 거예요.”
아직 끝까지 그리지 않았다는 그림은 세잔느가 그린 세잔느 부인의 초상화였다. (중략)
석 장의 그림은 액자도 없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더러운 벽지 위에서 마치 다른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처럼 빛나고 있었다. (402~403쪽)
위 내용을 읽고 집주인 아들이 된 듯하여, 다음날 서점으로 달려가 고호와 고갱과 세잔의 그림을 찾아봤다. 그리고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구매했다(이 놈의 호기심이 내 인생을 망칠 거다).
레마르크의 마지막 소설이자 유작 『그늘진 낙원』의 주인공 로버트 로스는 미국 망명 전 벨기에 브뤼셀 박물관에 2년 남짓 숨어산다. 밤마다 박물관 전시물과 미술품을 감상하다 나중에는 존재로 느끼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래서 미국으로 망명 후 진품을 감별하는 직업을 갖게 된다.
“나는 그 청동제품을 호텔방에 가져다 두었다. 형 로비는 그 물건이 원래는 뉴욕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가짜로 판명되어 처분된 거라고 말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 머물러 있었다. 어둑한 방 안에서 불을 켜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창틀에 세워둔 그 청동 제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브뤼셀 박물관에 있을 때 터득한 거지만 물건이란 오랫동안 쳐다봐야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다. 우리에게 대뜸 자기를 드러내버리는 물건은 결코 상품(上品)은 못 되는 것이다.” (범우사, 1992, 36쪽)
이때부터 미술관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다시, 소설 『개선문』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소설 속 ‘담배와 술’은 ‘그림과 책’이라는 대조적인 세계로 거리두기를 한 후 ‘파도와 바위’라는 이야기로 등장하며 사랑이라는 감정과 사랑하는 대상(애인)과 마주한다.
“바위를 사모하는 파도가 있었는데, 파도는 바위를 얼싸안고 거품을 내고 소용돌이치며 밤낮으로 한숨과 흐느낌으로 자기한테 오라고 애걸을 했지. 파도는 바위를 사모하고 그 바위에 미쳐서 차차 그 바위의 밑을 파헤쳤던 거야. 어느 날 기어이 바위는 지쳐 버리고 완전히 파헤쳐져서 파도의 팔 속에 묻혀 버렸단 말이야. (중략) 그러자 바위는 이제는 갑자기 놀고 장난치고 사랑하고 슬퍼할 수 있는 바위는 아니더란 말이야. 이제는 파도 속에 빠져서 바닷속에 뒹구는 한 덩어리의 돌덩이에 불과하게 된 거야. 파도는 실망해서 속았다고 생각하고는 그 뒤로는 다른 바위를 찾게 되었지.” (201쪽)
고향 독일에서 유능한 의사로 생활하다 직장과 가족을 잃고 파리의 피난민이 된 라비크(가명)로 사는 주인공은 단단한 자아(바위)가 되고자 한다. 그럴수록 방어적인 태도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감정에 젖는다. 흥미로운 점은 파도로 가라앉은 바다 속 바위는 돌덩이로 영원히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도에 의해서 바위가 아닌 돌덩이가 된 존재는 쓸모없는 덩어리(종양)가 되느냐 아니면 모레처럼 작아져 진주(생명)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를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위치가 된다.
소설 속에는 무심히 지나가는 두 여인이 나오는데, 사실은 그녀들이야말로 소설 『개선문』의 세계관을 표상한다. 한 여인 케이트 헤이그슈크렘은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꿈꾸지만 몸속에는 종양(암)이 자란다.
“케이트 헤이그슈트렘은 테이블 위에 놓인 진주 목걸이를 집어 두 손안에 넣고서 만지작거렸다. 야위고 긴 손가락 안에서 움직여지는 목걸이는 흡사 묵주처럼 보였다. (중략) 라비크는 진주를 본 일이 있었다. 진주란 형체도 없는 회색의 연체동물이 조개 속에 들어와 이질적인 물질인 한 알의 모래에 자극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저토록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이 우연의 자극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라고 라비크는 생각했다.” (338쪽)
흥미롭게도 E.H.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훌륭한 진주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진주조개 속에 작은 핵(核)이 필요하다. 모래알맹이라든가 뼛조각을 둘러싸고 그 위에 진주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한 단단한 핵이 없으면 진주가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한다. 만약 형태와 색채에 대한 미술가의 감각이 완벽한 작품 속에 결정(結晶) 되려면 그 역시 견고한 핵을 필요로 한다. 미술가에게 분명하게 주어진 임무가 그 핵이다. 그의 재능은 거기에 집중된다.” (열화당, 1996, 최민 옮김, 574쪽)
다른 여인 롤랑드는 화류계에 있다가 새로운 출발(결혼)을 위해서 파리를 떠나는데, 떠날 때 피난민 라비크에게 자신의 새로운 보금자리 주소를 알려주며 피난처 제공을 제의한다. 결국, 주인공 라비크는 죽음과 싸우는 실력 있는 의사(가운)에서 벗어나 생명을 찾아 떠나는 불안정한 인간의 길을 선택한다(마지막 장면에서 라비크는 담배를 찾지만, 담배는 트렁크 속에 짐처럼―마치 바닷속 바위처럼―있다는 생각을 한다).
작년 2020년 레마르크 서거 50주기를 맞아 공연을 기획했는데, 물거품이 됐다.
내게 담배와 미술(史)의 세계(케테 콜비치)로 인도한 레마르크를 기억하며 끼적끼적.
추신 : 레마르크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와 케테 콜비츠 그림을 융합한 공연 영상(아래)
케테 콜비츠 作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인천중구문화회관(2013.3 23) https://youtu.be/CvieyAaODN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