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Diaspora)영화제의 역설
디아스포라(Diaspora)를 이해하는 시민이 몇이나 될까?
언어의 격차는 차별을 낳는다.
디아스포라영화제를 주관하는 인천영상위원회는 인사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주와 이민의 중심지였던 인천은 이제 환영의 도시를 넘어 ‘디아스포라(Diaspora)’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중략) 디아스포라영화제는 경계를 넘어 공존의 가능성을 성찰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자리입니다. 올해도 영화를 통해 세계 각지의 디아스포라의 삶과 문화, 그리고 그들이 건네는 공존의 메시지를 선보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슬픈 역설을 발견한다. 즉, 인천에서 환영받으려면 예수와 마호메트처럼 고향에서 박해받고 이민을 떠난 후 귀국해야 하는 역설과 고향(인천)에 있는 사람들은 타자를 환영하기 위한 환영단으로 배치된다는 것이다. 타자(제국과 자본)의 시선과 언어에 의해 자국민이 식민지 원주민으로 전락한 꼴이다. 대체 디아스포라가 무엇이란 말인가?
통계 자료를 보면 일제강점기 때 이주를 가장 많이 한 지역은 경상북도와 전라남도다. 오히려 인천은 (인천에서 이민을 떠난 자보다) 해외 외국인과 전국의 농어촌 인구 유입이 더 많았다(현재도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다).
현덕 소설 『남생이』와 이태준 소설 『밤길』에는 농어촌 인구가 인천으로 이주하여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제국주의 식민지의 자본에 의해 노동을 하지만, 결국 이들이 근대도시 인천을 만든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은 포용의 도시와 노동의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천의 정치인과 지식인은 이 땅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에 대한 기억과 존중이 없다. 특히 노동자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에 바쁘다. 산업역군과 산업전사로 불리며 국가를 성장시켰지만, 이제는 명품도시와 국제도시의 격에 맞지 않는 불편한 존재로 지워야 할 대상이 되었다.
1996년부터 시작한 인천인권영화제는 올해 30회를 맞이한다. 하지만 인천시민의 관심 밖이다. 왜냐하면 인천의 노동자를 시민으로 성장시킨 것이 아니라 근로자와 납세자 그리고 소비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민을 환영단으로 만드는 지적 허영심보다 공동체 기억과 노동인권을 우선하는 게 인천의 급선무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어떻게 타자와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추신>
디아스포라영화제는 인천에서 열리지만 ‘인천디아스포라영화제’가 아닌 (지역명 없는) 디아스포라영화제이다.
(주최: 인천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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